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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댕 作/ "칼레의 시민"에 숨은 이야기 ※◈ 


 칼레의 시민 / 로댕 
로댕 作 "칼레의 시민"에 얽힌 이야기
프랑스 로르망디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끝까지 올라가면
 '칼레'라는 작은 항구도시가 나온다.
인구 12만인 이 항구는 영국의 도버해협과 불과 
20 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영국과 프랑스 페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소도시인 '칼레'는 세계에 자랑하는 미술품을 하나 갖고 있다. 
그것은 칼레 시청에 전시되어 있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라는 조각으로 6 명이 목에 밧줄을 감고
고통에 싸인 표정을 지으며 걸어가고 있는 작품이다. 
이 조각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칼레 시민'의 명예이며 프랑스의 긍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귀족의 의무를 뜻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단어의 상징이 바로 
이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칼레의 시민'에 얽힌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때 칼레시는 끝까지 
영국에 저항하다 구원군이 오지 않아
1347년 항복하게 된다. 
영국왕 에드워드3세는 이를 괘씸히 여겨 
누군가는 그 저항에 책임져야 한다며
6명의 칼레 시민이 목에 밧줄을 매고 영국군 
진영으로 걸어와 처형당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칼레에서 제일 부자인 
'외스타슈드 생 피에르'가 선뜻 나섰다. 
'장 데르'가 나섰고,이어 부자 상인인 
'피에르 드 위쌍'이 나섰다. 
게다가 '드 위쌍'의
아들마저 아버지의 위대한 정신을 따르겠다며
나서는 바람에 이에 감격한 시민 3 명이 
또 나타나 한 명이 더 많은 7 명이 되었다. 
'외스타슈'는
"제비를 뽑으면 인간인 이상 행운을 바라기 
때문에 내일 아침 처형장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고 제의했다.

다음날 아침 6명이 처형장에 모였을 때 
'외스타슈'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시민들이 그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
'외스타슈'는 이미 자살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처형을 자원한 7명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으면 
순교자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자신이
 먼저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이에 영국 왕비가 크게 감동하여 에드워드 3세에게
칼레시민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애원했다.
당시 왕비는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왕은
소원을 받아들여 처형을 취소했다.

그후 칼레는 '노블레스(귀족) 오블리주(의무)'라는
단어의 상징으로 등장했으며 몇 백 년이 지난 후
시의 요청으로 로댕이 10 년 작업 끝에 
"칼레의 시민"이라는 조각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이처럼 국방에서 비롯된 정신이다.
2차 대전 때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당시에는 공주 신분)
이 수송부대 하사관으로 근무했다든지,
영국왕자들이 최근 이라크전쟁에서 일선근무하는 등의 
시범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 옮긴 글 *^~


 §* 신누리 서봉 (瑞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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