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상처를 많이 받고 배신을 많이 당한 편에 속한다. 설거지를 하니까 그릇이 깨지는 거라고, 그만큼 남보다 치열하게 살아와서 그럴 거라고 자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왜 내 주변엔 유독 그런 사람이 많을까, 하고 고민해왔다. 1년여를 내 집에 머물게 하고 일자리까지 알아봐 준 친구가 방송가에서 내 험담을 하고 다니는가하면, 정성을 다해 일을 도왔던 동료가 공개석상에서 나를 몰아붙이기도 했다. 금전적인 피해는 물론이고 정신적, 인간적인 배신을 당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것도 가장 가깝고 가장 믿었던 인물들로부터.
그 모든 게 남 탓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잘해주었을 뿐인데, 왜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지?’하며 괴로워했다. 그것은 내 20대 내내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였다. 최근 들어 비슷한 일이 또 벌어졌다.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도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냐고 하소연하고 있을 때 나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선배가 입을 열었다. “넌 너무 패를 일찍 까서 그래. 그게 서로를 위해 좋은 방법이 아냐.”
맞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순간에 내 모든 것을 보여주는 편이다. 인터넷에서 하는 말로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라는 신조어가 있는데 내가 딱 그 꼴인 셈이다. 만난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남녀불문 그 사람에게 반해버리고 만다. 상대의 장점을 기막히게 잘도 찾아낸다. 그리고는 평생 함께 갈사이라도 되는 양 내 모든 걸 퍼주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냥 주는 게 아니다. 나를 다 보여준다. 부끄러운 내 허점, 내 숨겨야할 과오까지 다 드러내며 그 관계를 시작한다. 그래야 친해지는 거라 믿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런 방식으로 다가온 나를, 상대는 부담스러워하거나 우습게 본다. 내가 베푼 정성과 마음에 대해서 고마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다. 거기서부터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한다. 그 관계에 대한 서로의 기대와 청사진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를 우습게 보는 걸 넘어 내가 이룬 성과와 내 성공에 대해서도 낮게 평가한다. 분명히 당신이 더 잘났는데 평소에 우습게보던 저 사람이 더 잘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 한다. 사람은 그렇다. 다 보여주면 우스워진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언제나 선하려고 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파멸할 수밖에 없다”고 썼다. 나를 다 까발리는 게 선한 거라고 그게 옳은 인간관계의 시작이라고 믿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지나고 나서 보니 내 주변 많은 여성 직장인 초년병들이 겪는 문제였다. 남자보다는 여자의 비율이 확실히 높았다.
조금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가족이나 연인,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다. 다 보여주면 안 될 일이다. 사람 사이의 일이란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서로 틀어질 사건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단연 더 많이 보여준 사람, 자신을 한없이 개방해 예측 가능한 사람이 희생양이 된다. 하물며 전쟁터와 다를 바 없는 직장생활에서는 자신을 얼마나 잘 감추고 의도를 숨길 줄 아는 기술을 가졌느냐가 관건이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누가 더 능력 있어 보이는지, 누가 더 뛰어난 사람인지를 증명해 관계의 우위를 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 전 <회사 생활에 대한 위험한 착각>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여성들이 직장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들이 회사생활에 대처하는 남녀의 생각과 행동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여자들 자신’에게 있으며, 여자들이 회사생활에 대처하는 방식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말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총 8가지 항목인, ‘상사’, ‘팀플레이’, ‘경쟁’, ‘자신에 대한 비판과 칭찬’, ‘권력’, ‘목표’, ‘성공’, ‘연봉’ 으로 나누어서 각각의 항목에 대해 남녀가 서로 어떻게 다르게 대응하는지, 또 그 대처법으로 인해 여자들은 어떤 잘못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보여준다.
커뮤니케이션 박사이자 현재 기업들을 대상으로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남녀의 서로 다른 행동패턴을 비교 분석해, 남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여자들의 회사생활방식에 대해 그 위험성을 지적한 책이다. 저자는 20년 넘게 다양한 조직에서 일하는 남녀 직장인들을 상담한 경험을 바탕으로 능력 있고 야무지고 일 잘 하는 여자들이 어느 순간 회사생활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이유와, 왜 남자들은 승승장구하는데 열심히 일에 매진하는 자신들은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는 등 어려움을 겪는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가식적인’이라는 수식어를 피하고 싶어 한다. 그와 비슷한 사람으로 분류될까봐 치를 떨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착각이자 실수다. 직장생활에서 가식은 최고의 전략이다. 자신의 의도와 본질을 감추고, 늘 편안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에서 ‘가식’의 쌍둥이 언니뻘 되는 단어가 ‘내공’이다. 얼마나 나를 감추고, 내가 목표로 하는 모습, 그러니까 능력은 최고지만 인간성은 진실 된 사람으로 비치게 할 수 있는가, 그게 내공이자 가식이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보통 여자들은 느끼는 대로 말을 뱉고, 좋고 싫음을 표정으로 감추지 못하며, 늘 계획과 의도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말을 자제하고 표정을 감추는 데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사회생활 초년생이나 인생에 별 목표가 없는 사람들은 그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한다. 또한 정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면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관계가 틀어지는 계기를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직급이 올라가면서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가식적이지 않으면(좋은 말로 내공이 깊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게 직장생활이지만, 가식적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껍질 관리를 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적당히 얇은 첫 번째 껍질로 친절한 캐릭터를 만들고, 오랜 시간동안 신뢰를 쌓은 사람에게만 허락하는 두 번째 껍질로 쉽지 않은 인물이라는 평판을 얻어야 한다. 가장 큰 가식은, 가식을 감추는 것 아닐는지. 뭔가 거룩한 내용을 가르치는 자기계발서는 아니지만, 직장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이라면 한번쯤 읽어봄직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