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그림에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선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선은 어느 지점까지 밀고 나간 자취고 흔적이다. 그래서 선은
시간과 운동을 보여준다.
서양과 동양의 모든 그림은 하나의 선으로 부터 시작된다.
서양인에게 그림이라는 것은 단단한 재료를 가지고 표면을
긁거나 새기는 행위였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선은 부드러운 모필로 표면의 내부를
감싸거나 삼투하는 그런 선이었다.
서양의 선들이 직선적이고 운동적이고 어떤 목적 지향적이라면
동양의 선들은 내부를 삼투하고 순환하고 재료와 함께 섞여
들여가는 선이었던 것 같다. 서양의 붓과 펜이 분리되어 있다면
동양에서는 선과 글자를 이루는 재료는 모두다 공이 부셨다고
하는 사실이 흥미롭다.
모든 그림은 선으로 부터 시작해 선 하나로 완결된다라고 말해볼
수 있다.
언젠가 수화 김환기가 쓴 수필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자신의 딸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 관심있다고 하니까 당시
파리에 있던 김환기는 딸에게 이렇게 간곡히 부탁한다.
"연필 장난을 많이 해라. 끝없이 선을 그어라. 연필 장난을 많이
하는게 좋은 작가가 된다."
물론 지금의 입시에서는 학원에서 암기처럼 그림을 그리고 재료를
다루지만 이렇게해서 대학에 들어가서는 좋은 작가가 되기 어렵다.
어린시절부터 우리는 끝없이 연필과 모필을 가지고 노는 놀이체험을
통해서 자신만의 선들, 자신의 육화된 선들, 누구하고도 공유될수
없는 매혹된 선들을 그릴수 있을때 좋은 화가가 될수 있다. 저는
지금도 전시장에서 작품들을 볼때 붓질하는 선하나만 보면 대충
이 작가가 어느정도의 내공이 있는 작가구나하는 것을 판단하게
된다. 결국 그림은 선하나를 향해서 끝까지 가는 것이다. 좋은
선하나를 긋기 위해서 어떤 정점을 향해서 육박해 나가는 그런
존재를 볼때 그게 바로 거장이란 생각이 든다.
최근에 본 윤향란이라는 작가는 아주 오랫동안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작가다.
국내에서는 잘 안알려져있지만 4~5년에 한번씩 가끔 전시할때
가서 보는데 여전히 작품은 거의 똑같은 작업이다.
이 작가는 종이에 파스텔 또는 목탄으로 선을 그었다. 마치 아이
들의 장난처럼 선을 그적그적 거린 선의 자취에 불과하다.
무언가를 재연하거나 묘사하지도 않았고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형상을 안기지도 않는다.
단지 주어진 사각형안에 파스텔을 가지고 그어나간 흔적이다.
제목이 산책이다.
주어진 사각형안에서 파스텔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밀고 나간
산책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이 그림을 볼때마다 선하나의 힘과
감각적으로 구부리고 긁어놓은 흔적 자체에서 이 작가만의
매력적인 힘을 느낀다.
그림이 이야기하거나 과도한 물질체험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단순한 하얀종이에 파스텔 하나만으로도 작가의 모든 것을
단숨에 보여줄수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좋은 미술이다.
이 작가는 초록색의 파스텔 하나를 가지고 선을 소박하게
그었다. 그것은 자신의 예민한 신경이기도 하고 감각이기도
하고 선의 시작과 끝에 이르는 과정들을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선 긋기라는 감각들을 극대화 시켜서 드러내고 있다.
윤향란의 이 작업은 추상이기도 하고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선긋기 행위이지만 선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매혹적인 작품이
될수 있는가 좋은 문장은 압축적이고 간결한 문장이듯이
좋은 그림역시 수다스럽거나 번잡한 것이 아니라 핵심으로만
파고드는 요체만을 보여주는 그 지점에서 판가름이 난다라고
말해 볼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