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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과의 글마당

향기의 글(구명선 작가의 연필로)

구명선 작가의 연필로 그려진 그림
박영택

이 그림은 연필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연필이라고 하면 그림의 밑그림을 그리는 스케치, 에스키스, 드로잉을 하는 도구입니다.
사실 연필은 우리에게 근대에 와서 수용된 도구입니다.
그 이전에는 부드러운 모필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습니다.
전통사회에서 붓은 그림을 그리고 쓰는 양쪽을 겸한 도구라고 말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모필은 부드러운 신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라기 보다는 주어진 재료의 특질에 수능하는 도구적 역할을 합니다. 모필을 다룬 다는 것은 매우 숙련되야 하고 경험적인 시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서양의 붓은 딱딱하고 견고하기 때문에 인간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구축적인 도구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림을 그리는 도구의 차이가 동서양회화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말해볼 수 있습니다.

반면 연필은 필기구로써 다뤄졌고 한편으론 그림을 그리는 재료적 역할도 합니다.
이 딱딱한 경질의 재료를 가지고 글을 쓰거나 스케치를 했던 추억들이 있으실 겁니다.
그러나 연필은 그림을 그리는 밑작업을 하는데 사용되는 것이지 연필자체로만 그림을 온전히 만들기는 어려웠다고 보여집니다. 대게 수채화라던가 다른 그림을 그리는 밑작업으로 쓰여집니다. 반면 구명선이라는 작가는 미술 연필만으로 독자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연필화라고 말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목탄화, 콘테화, 연필화도 있지만 연필자체를 통해서 깊이있고 완성도가 높은 그림을 그린 다는 것도 새삼스럽습니다. 우리는 그림하면 유화나 수채화로만 생각하지만 연필, 목탄, 콘테, 분필, 볼펜등으로도 충분히 그림이 이루어 질수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이 작가가 그린 그림은 연필로 그려진 그림이면서 만화같기도 합니다. 무척 화가난듯한 여자가 눈에서 광선을 쏘듯이 노려보고 있는 장면입니다. 제목이 '왜 말 안했어'입니다. 이 그림속 주인공은 그림그리는 작가 자신일텐데 자신의 남자친구가 어떤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투정하거나 화를 내고 있는 그 순간의 감정을 기억해서 그린 그림같습니다. 이렇듯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그림은 상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발화되고 있습니다. 마치 문장같은 그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은 흔히 봤었던 순정만화의 주인공을 닮았습니다. 커다란 창문같은 눈에 보석같은 눈빛을 반짝거리고 작은 입술을 가지구 있는 그런 얼굴입니다. 짙고 어두운 배경을 중심으로 해서 눈에 불을 밝히고 쏘아 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섬뜩하게 들어납니다. 만화나 순수미술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일러스트레이션이나 회화같은 것도 무화시키고 다만 연필이라고 하는 익숙한 재료를 가지고도 문장같은 그림을 견고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더 재미난 것은 지극히 소소하지만 선명한 어떤 감정의 순간들을 형상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말 안했어'라고 쏘아 붙히거나 다그치면서 남자친구에게 화를 내는 자신의 감정의 한 순간들을 딱 떨어지는 문장같은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그림입니다. 즉 오늘날 그림은 어떤 습관적, 관습적소재를 반복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들을 솔직하게 문장화시키는 것 그것이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작업태도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