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핸 폰엔 전주 근섭이 부인의 부음 멧세지가 찍혀 있다.
지난주 찾아갔을 때에 금년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그 말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오후에 아내와 전주를 갔다. 전주 시내에선 변방으로 모악산 산하,
장례문화예식장이란 간판의 거대한 건물이 첫 눈에 어스름한 그런
분위기로 위압감이 드는 느낌이었다.
승강기의 안내문을 보니 202호란다. 맹인의 나이가 70세라,
영전에 걸려진 옛 모습의 사진은 표정이 없다.
나는 설음이 복받혀 눈물을 한참 닦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향을 피워드리고 국화 꽃을 사진 앞에 올리며 평안히 가십시오,
인사를 드리고 두 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친구를 위로하는 말도
뭐라고 해야 할지,? 그냥 뭐라 할 말이 없다고 만 하였다.
조문객들을 위한 자리로 가서 숙영이(큰딸이 왔기에 위로도 하고)
우리친구 근섭이와 한 마을에서 살아 온 전직 동료 창섭이가 찾아
와서 자리를 함께 한다. 반가운 인사를 하며 자리가 초상 분위기라
조용히 이런저런 이야기로 맥주를 한 잔 나누엇다.
창섭이는 술을 거듭하며 근섭이 걱정을 하는 말을 하기시작 한다.
누구나 내 자식의 흉은 볼수 없지만 다른 사람은 우리자식 이야기
를 하 듯, 근섭이 자식들에 대한 불효를 토로하고 있었다.
나는 근섭이 가족들이 들을 가보아서 말리기도 하였지만 창섭이는
근섭이 자식들이 미움 마음이 드는 듯 싶다. 하기야 내 자식일을
마음대로 할 수도 없지 않은 가,?
나는 이런 사람사는 이치를 다시 한번 개우치는 자리가 되어 숙연
한 심정으로 듣고만 잇었다.
나는 근섭이 친구의 마음고생도 다시 곰곰히 생각을 하고 있다.
부인마저 떠나고 자신의 병고로 시달리며 그 손자들까지 떠 맡아
참 기가 막힐 지경임을 돌아 보기도 하았다.
전주에서 잠을 자려고 준비를 하고 왓지만 관용친구도 다른 친구
들도 조문만 마치고 돌아 갔다며 내일은 주일이라 아내의 교회일
도 고려하여 우리보고 돌아가라는 것이엇다.
마음 단단히 먹고 건강하라는 인사를 나누고 귀가길에 올랐다.
밤길 운전으로 운행하는 마음이 불안하여 몇 번이나 길을 헤매며
고속도로에서는 앗차하면 앞차를 들어 받을 뻔 하며 겨우 겨우
집에 당도하여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래도 안전하게 온 것이 감사하고 집에 와 쉴수 있어 평안한
마음이다.
피곤하여 아내와 유자차를 한 잔씩 나누고 쉰다.
2010년 11월 27일 토요일 흐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