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에 한 분계시는 우리 누님께서 매형님과 우리 집엘
오셧다. 동생집엘 오고 싶어도 차를 타시면 멀미를 하시기에
연로하신 몸으로 올수가 없다고 미루시다가 큰 마음으로
영등포에서 새마을호를 타시고 오셨다.
광주역 프렛홈에까지 마중을 갔다. 매형님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시는 두 분을 보며 생각보다 건강하시고 누님께선 모자를
쓰셔서 먼발치로 뵙기에는 더 젊어 보이신다.
누님보다 열살이나 아래인 나는 어머님이 46살에 나를 낳으셧다.
그래서 누님을 막네라고 불렸지만 내가 태어나고 막네가 바뀐것,
누님네는 10여일을 함께 시내도 둘러 보며 즐거우신 나날을 보내
셨다.
내가 배우는 아코디언으로 봉선화를 연주하면 누님이 노래를
따라 하셨다.
내가 5섯살 무렵 형님은 26살에 어른이었단다.
21년이나 차이가 난 것이다.
우리 형님은 그 시절 바이어린을 배우시고 단발머리 누님은
이 봉선화 노래를 옆에서 불렀단다.
60년이 훌적 지나고 동생의 아코디언에 소녀적 그 노래를 다시
불러 주신다.
우리 형님은 군산에서 세관을 다니셨으나 일본군 징용으로 끓여
가셧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인근 자바섬에서 전쟁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머님은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자나깨나
아들 살아 오도록 빌고 만 게셧단다.
그러다 해방을 맞아 죽엇다는 형님이 제일 마지막 진열에 정신
불구자로 귀국을 하셨다
부모님이 큰 아들의 병때문에 백방으로 치료를 하엿지만 결국
불치의 병으로 가산만 박살나고 말았다.
마운둥이 막네인 나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된 세월,...
어머니처럼 나를 길러주신 우리 누님께선,
애절한 옛 이야기와 함께 봉선화 노래를 부르시며 눈시울을
적시고 계셨다.
어머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아버지 홀로 외롭게 사시던
어린날 기억은 고사리 같은 내 손목을 잡고 자주 우시 던
우리 아버지,..
그 기억이 아직도 눈 에 선하게 떠 오른다....!
울밑에서 봉선화야~~~
그 만큼이나 우리 가정에 한 된 아픔이 서린 노래라 여겨진다.
형님은 나라의 자유를 잃으신 그 아픔을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에 한 된 고통들을 누님의 노래로 다독이 던 봉선화 ,...
그래서 내 평생에 값진 결실을 이룬 극기克己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연주를 하고 있는 노래,...
아~ 울밑에 선 봉선화야,
2011년 5월 17일 화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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