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코디언을 가는 날이다.
의사선생님은 더 쉬라고 하여 아내와 바람을 쏘이러 간다.
영광에서 정년을 하여 이쪽 방향이 운전을 하는 게 편하여 지난번에도
불갑사 산체 보리밥집에서 식사도 하고 해안도로를 타며 쉬고 온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영광을 지나 부안쪽을 미리 게획하고 있었다.
오는 28일엔 부안의 누님에 큰 딸네가 아들(막네) 결혼식을 갖는다.
주말이고 다른 약속이 잇어 내친김에 오늘 먼저 가서 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올 심산이엇다.그래서 차중에서야 아내에게 부안을 가는 길이라
귀뜸을 하여 준다.
나와는 20년 가까이 나이 차가 있는 우리 큰 누님,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시집을 가셔서 부안 행안면 바닷가의 농촌에서
모진 시집살이로 평생을 사셧다고 듣기만 하던 그 누님,
우리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처음으로 집을 찾아 오셧지만
아버지는 너는 딸도 아니라며 보퉁이를 마당에 던지시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는 나도 그 누님이 밉기만 하였다.어디 글럴 수가 있을가,?
우리 아버지는 끝내 그 누님을 부둥켜 앉고 서럽게 서럽게 울기만
하시는 것이었다.
애비죄를 용서 하라며 자식사랑을 잘 못한 애비죄를 통탄하신 것으로
기억이 난다. 불효가 어찌 딸자식에 탓 만일 것인가,?
딸자식 출가 외인이라 했거니,...
그 남이 된 사람에게 효를 기대한 아버지도 딸에 입장을 용서 하시는
것이었으리라.
이런 우리 누님은 자신이 시집가고 없는 사이 어머니의 46살에 (동생)
마훈둥이 나를 낳으셧다.
어려운 친정에서 어린 동생을 낳아 기르시느라 고생되신 일,
도움도 못 드려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셧을가,...
누님도 나이가 들어 매형님과 동생집에 한 번을 다녀가시고 동생이
도회지로 가서 성공을 하여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보시고 얼마나
기뻐 하시던 일도 추억으로 남겨저 잇다.
그 누님은 매형님보다 세상을 먼저 떠나시고 내가 철이 드러선지
생전에 누님에게 더 잘 하여드리지 못한 아픔으로 홀로 사시는 매형댁을
가끔씩 찾아가 식사도 대접하고 아내는 방 청소도 하고 하는 시간을
마련하기도 하엿다.
읍내에 누님의 큰 딸네가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매형님이나 누님이 살아 게실 적에 조카들의 이야기야
대충 건성으로만 듣고 지내던 사이엿다.
조카사위는 군의원이고 마을금고 이사장을 하며 잘 살고 잇다.
오늘 조카집에 가서 식사도 대접을 받고 삼남 1녀의 자식들 사는 이야기
도 진지하게 잘 들었다.
큰 아들이 미국 LA에서 영주권을 얻어 딸을 둘 낳고 복되게 산다는등,
지금 까지 전혀 나누지 못한 누님댁 가족에 대한 가족인연 내력을
금광에 새로운 금맥처럼 오진 핏줄기,로 감동에 용솟음이 친 셈이다.
더구나
조카들이 하나 밖에 없는 외 삼촌의 일에 관심을 많이도 간직하여 우리
자녀들 사는 일도 자상하게 묻기도 하여 한 핏줄에 끈질긴 여운 으로
뇌리 깊히 간직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우리 나이 70줄을 넘고 이런 피줄의 흐름을 찾아 생애 활력을 얻는 것,
참 보람이 되었다.
그래서 조카 아들 결혼 식이 끝나고 시원한 가을날 다시 두집 내외가
만나 이보다 더 기쁨을 만드는 자리를 마련 하자고 약속을 하며 헤어
젔다.
돌아 오는 길에 새만금 뚝 길을 타고 중간 쉼터가지 둘러보고 다시
변산으로 격포로 들어가 마른 건어들도 사고 돌아 왔다.
중간에 시원한 소나기도 만나고 고속도로 진입을 잘 못하여 긴장을
하며 왔다리 갔다리 하는 웃기는 일들마저 그저 즐거움이 되어준
하루였다고,...돌아 본다.
2010년 8월 24일 화요일 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