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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발자취

손자 생일날 추억

3.1절이다.

아침에 비가 내려서 국기를 게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이 우리 큰 손자 생일이다  손자아이가

양식을 먹고싶다 하여 우리는 아들네랑 양식집

으로가서 손자의 생일축하를 하여 주었다.

더욱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하라.

그리고 집에서는 엄마 아빠 학교에선 선생님 말씀

잘 듣도록 하고 친구들과 신의를 지키는 일,

동생과 사이좋게 잘 지내도록 권장도 하엿다. 

중학교 2학년인 이 손자는 핀란드 헬싱키에서 태어

났다.

자식이 타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저희들이나

부모된 우리들이 겪은 일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이곳 겨울이 춥다는 것,  

눈도 많고 추운 곳인 데, 먹는 것도 양식을 하자니

저희 어머니 된 심정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주 우체국 소포로 고추가루나 마른 식품을 보내

주지만 세관의 통과가 어려운 점,

옷 가지도 두터운 것을 챙겨 보내주어야 했다.

핀란드엔 북한 대사관이 있고 공작원이 유럽쪽에

유학생 납치사건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전화통화를 하여도 한국과의 시차관계상

어렵고 더구나 아들이 전화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다.

우리는 항공우편을 이용하는데 보통 7~9일정도가

소요된다.

아내와 나는 아들을 외국에 유학을 간 것이 후회 된

기억이다.

결혼 나이라 혼사를 치루엇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엿지만 저 자신도 혼자 있기를 고집하였다.

헬싱기대학 박사과정을 마칠무렵 결혼을 성사시켜

며느리랑 그 곳에 살림을 차렸다.

장학금으로 생활을 하기에 힘들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모 신세를 짖지 않으려 고생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 혼자의 힘으로 장하게 살았다.

1년만엔가 아이를 낳을때 아내와 안사돈이 그 곳

헬싱키를 가서 산후조리를 하여 주고 왔다.

그 당시 핀란드 국가는 유학생에게 도 의료헤택을

베풀어 아주 편안하게 병원의 봉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손자 아이는 호적에도 헬싱키 출생으로

기록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아들 덕택으로 두 차례나 필란드를 비롯하여

스웨덴 에스토니아등을 돌아보는 여행을 하였다.

핀란드는 우리나라 전체의 2배나 되는 국토에 수림과

호수가 80퍼센트나 된다는 것, 그러나 인구는 500만

헬싱키엔 50만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가지를 벗어나면 사람 구경이 힘들 정도에

가는곳마다 아름다운 호수와 수목이 울창한 곳,

참 고마운 일로는 교민들이 한 가족처럼 지내는 것,

그 때 외교관 최씨 과장님은 아들을 동생처럼 돌보아

주고 있었다.

그 분은 고국의 부모님을 모시 듯, 골프도 주선하였고

라운딩 중에 호수로 공을 여러개 빠트리기도 했다.

이렇게 달콤한 추억을 이야기하는 자리,

손자에게 언젠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핀란드에 다른

인연을 기리게 하는 굼나무를 심도록 당부도 하여 준다. 

우리집 3 남매의 아들 하나가 두 손자를 두엇기에 가족

행사에 남자가 4명이고 여자가 2명 이었다.

부모들 욕심은 딸 아이도 하나 있었으면 하지만

저희들 뜻이 없는 듯 싶다. 며

아내와 나는 웃음을 담고 집으로 온다.

저희들 스스로 유학도 하고 결혼 해서 잘 살아줘서 고맙

기만 하다.

어디 그 뿐인가,!

효심도 지극하여 자식 둔 보람에 늘 흐믓하기만 하여

참 복이 넘치고 있다.

 

2011년 3월 1일 화요일 비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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