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선산에 우리아버님 어머님께서 함께 계시고
그 아래에 형님이 홀로 외로이 누어 계신다.
형님은 아들이 둘 이나 있는데, 그 아들들이 한 번도
저희 아버지인 형님의 묘소를 오지 않았다.
작은 조카가 묘역을 거두는 일에 연락을 하여 돈을
보내 온 일, 그 뿐이다.
큰 조카는 아들 딸 남매를 두고 작은 조카는 딸만
둘을 두었다.
집안에서 매년 시제를 모시고 우리는 추석임녀 선산을
가서 우리부모님 성묘와 형님의 묘소를 찾아 뵙는다.
우리 부모님은 아들 둘에 딸,셋 오남매를 두셧다.
형님과 나는 21년이나 차이가 난다. 맨 막네 누님이
막네로 알았는데 어머니 46에 마훈둥이로 태어났다.
형님은 젊어서 체구도 좋고 머리가 명석하여 군산
세관에서 근무를 하였다고 한다.
형수씨는 아들 딸 하나를 두시고 세관근무를 하시며
우리집은 군산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잘 살고 있었지만
딸이 병으로 죽고 형님께서는 2차대전이 한 창인 때,
일본군에 입대를 하여 진주만 전쟁터로 가셧다고 들었다.
해방이되고 다른 사람들은 오는 데 형님은 오시질 않아
죽은 줄 알고 어머님은 형님의 제사까지 지냈단다.
어느날 형님은 불구의 몸으로 살아서 돌아 오셨다. 이렇게
라도 살아 온 것이 얼마나 감사하다고 하셨다.
그 때 나는 8살쯤으로 기억한다.
몸보다 정신적 불구라 별의 별 약이며 치료를 하였지만
회복이 않되었다.
돌아오셔서 형수씨와 잠시 살며 둘째 조카가 태어나고
아버지가 장사도 하시고 학생들 한자 지도를 하시어 겨우
생게를 이어 갔다.
젊은 형수씨는 두 조카를 친정에 두고 출가를 하게된다.
이렇게 두 조카는 외가집에서 자라고 학교를 다녔고
형님이 병중이라 누가 돌보아 줄 사람도 없이 외 할머님
홀로 이 두 조카들을 정성껏 보아주셨다.
그렇다 외할머니도 연로하시고 조카들도 외 가를 떠나
자립들을 하게 되었다.
형님께서도 회갑을 맞는 나이쯤엔 정신이 많이 좋아저
아들이 생일 식사대접도 받으며 서울을 오가기도 했다.
그렇다 62세를 일기로 세상은 떠나셨다.
지금은 저희들도 가정을 이루고 잘 들 살고 있다.
하지만 외가집에서만 살아서 우리와 는 먼 친척정도일
만큼의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작은 아버지라고 서울 가는 길에 가끔씩 찾는다.
우리 자식들도 남의 집 딸이나 아들이 며느리 사의로
살게 되어 자주 만나는 일도 없고 자연히 멀어진 듯,
그런 사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 갑짝이 큰 조카의 전화가 왔다.
오는 9일 토요일에 큰조카 아들 딸 남메가 하아버지의
산소를 찾아 뵙겠다고 하여 큰 조카랑 고향을 온다,는 것,
요즘 젊은 세대에 이고마운 일을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나는 참 기쁘기만 하여 내가 그날 찾아가서 안내를 하려
간다고 답을 주었다.
이 것이 핏줄의 정,이라 믿는다. 엎지면 코다는 곳,
조카들이 형님과의 거리가 천리 만리도 더 멀던 세월들,..
형님에 영혼이 올해 새 봄은 참 기쁨이 되시겠구나,..
형님!
그 동안 많이 외로우셧지요, 손자들이 아들을 손잡고
온 답니다.
따뜻한 봄바람으로 서운하던일 용서로 다 풀어주십시오
동생도 이렇게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이다.
2011년 4월 5일 화요일 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