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혼자 악기를 연습하고 쉬면서 직장생활을 할 때의
토요일을 맞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간부시험을 위하여 서울본사에 지원을 하여 그 시절 청파동
에 혼자서 여인숙방을 얻어 잠만 자고 식사는 여기저기를
돌며 주로 실비집에서 사서 먹던 때다.
주말에 집에 오는 것은 차비가들고 공부도 하기 때문에 한
달에 한번 정도를 온다.그래서 나와 가족이 불편하여 이사를
하려고 광주집을 정리하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광주집을
팔아 서울에 방을 얻기도 힘든 판에 집을 구한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가 되어 포기를 하고 우선 시험이나 합격을
하고 보자는 게 최선의 방법이엇다.
다행히 5개월만에 기적같은 시험의 꿈을 일구고 고향으로
오는 운동에 주력을 하였다.
그 후 간부로 받은 보직이 순천에 근무를 하였다.
집에까지 한 시간 반의 거리다 여기서는 하숙을 하엿기에
매주 토요일이면 바짐없이 광주로 온 듯싶다.
38년간 직장생활 하면서 이렇게 객지로 다니며 집엘 오가는
일들에 추억들이 많앗다고 돌아 본다.
어느 해 아내가 대수술을 받던 일로 내가 얼마나 놀라며 큰
고통을 당한 아픔이 있었는가 하면 전주에 근무를 할 때는
그 시절 직장에선 자주 비상훈련이 있어 월요일 새벽에 상사와
랜드카를 이용 전주로 가던 도중 고속도로에서 대형사고를
당하여 죽는 줄 알앗지만 다행히 어깨뼈의 상처를 입어 병원
생활을 좀 하던 일도 있었다.
또한 영광에 근무를 할때는 승용차를 주로 이용하였다.
주말이랍시고 동료들과 점심에 약주를 들고 음주운전을 하고
집에까지 오던 일들이 다반사였다.
눈길에 차를 논 두렁에 밖히는 사고를 당하고 다시는 위험한
운전을 단절한 아찔한 악몽의 기억들,...
이렇게 장기근속을 하면서 주말의 기억이 새삼 기적같은 일로
떠오른다. 그런 위험을 딛고 그래도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잇다는 점에서 지난일들이 고맙기도 하다.
저녁은 대학경우회란 동기 모임날이라 부부동반으로 다녀
온다.
50년 가까이 모이는 우리들 이제 백발에 건강 이야기가 많고
아직도 서형은 손자들 뒷바라지에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가을엔 하루 코스의 여행을 가자는 의견을 나누고 평범한
모임으로 마친다.
곽회장님의 노색이 완연하다는 아내의 말에 나도 동감이다.
80이 얼마남지 않았고 혼자 살고 잇어 모일때마다 달리
보인다.
지하철을 이용하고 오는데 아내가 나에게서 술냄새가 난다
며 자리를 옮겨보란다.
그냥 서서 온다.
금년도 7월이 반을 넘고 지루한 장마비도 멈춘 듯 태양열이
따갑기만 하다. 토요일을 맞아 오늘도 이렇게 여러 생각에
모임자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을 누렸다. 앞으로도 나의
삶에 발자취가 어느 날자마다 복된 날로 넘치길 소망하여
본다.
오늘은 이런 글을 남겨 둔다.
그리움
뒷 집골목
불럭을 뚫고 핀
노란 민들레 한 송이
장마비로
쓸어진 기도는
이 생명 평안주소서
가슴 조여
초라하게 피운
내 가족사랑의 투혼
세월따라
가깝고 먼 길로
날아 간 그 씨앗들이
어느 세상
그 험한 틈새에
내려 논 두려운 삶,
민들레 꽃
뿌리에 굳셈을
놓칠세라 꼭 메달라,...!
어미심정
진한 그리움에
합장 또 합장 비노라
2011년 7월 16일 토요일